세상에서 하앍할 것은 많다.  그중에서 동남아사에 하앍하는 부류, 특히 T모씨와 클론들이 젤 하앍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코끼리이다. T모씨처럼 술쳐먹인 영리한 코끼리가 무적인가는 현실과 좀 심히 차이날 듯 하지만, 동남아에서 코끼리에 하앍한 나라는 많다. 특히 이번에 소개할 나라는 코끼리에 다른나라보다 더욱 더 하앍했는...가는 몰라도 아예 코끼리를 나라 이름에까지 넣었다. 바로 지금의 라오스인 란 쌍이다. 그 뜻이 백만마리의 코끼리이니 T모씨가 엄청 하앍할듯 하다.

 

하앍하앍하앍

 

이렇게 국명에 코끼리를 넣은 란 쌍은 어떤 국가일까? 분명히 국명에는 백만의 코끼리라고 코끼리를 강조하지만, 코끼리가 특별한 역활을 했는가는 모르겠다. 주변에서도 코끼리가 많이 난다고 하긴 했지만 백만마리도 아니고, 그냥 많을 뿐이다. 참고로 전 세계 코끼리 개채수가 100만이 안되고 아시아 코끼리는 6만밖에 안되니 현실성이 얼마나 없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즉 T모씨의 환상은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초반은 지금보다는 나았다. 변명해 줄 것은 이정도 뿐이다.

 

지금의 국명인 라오스에서 나오다시피, 현재 라오스인 란 쌍 왕국의 주민족은 라오족이었다. 이 라오족은 타이계 제민족중 하나였다. 라오족도 다른 타이족처럼 북쪽에서 남하한 듯 하다. 이들은 운남지방을 거쳐 라오스로 왔으며, 처음에는 크메르의 영향권아래 있었다. 원래 뉴비의 법칙은 기존질서의 순응인 것이다. 허나 강력했던 앙코르제국도 약화되었다. 그 틈을 타 쑤코타이가 건국되었고, 쑤코타이의 등장은 앙코르조의 쇠퇴를 더욱 더 부채질 했다. 라오족이 나라를 세운 것도 이 때를 틈타서 였다.

 

뉴비는 현질이 법칙?

 

란쌍은 1353년 캄보디아로 튀었다가 돌아온 파 응움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그는 캄보디아 여자와 결혼하고 캄보디아의 꼬붕으로 일하면서 현재 라오스 일대의 무앙들을 정벌했고, 루앙프라방을 점령한 후 내가 니 씨다바리가? 하고 외치고 독립했다. 장동건은 유오성에게 죽고싶나? 라고 말을 듣자 충실한 씨다바리로 살았지만 라오스는 달랐다. 이미 캄보디아는 쑤코타이-아유타야로 이어지는 타이왕조의 어택땅으로 세력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 웅음은 뛰어난 지도자였던듯 하다. 그는 즉위후 사방으로 영토를 늘였다. 이에는 운남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남하하던 타이족의 영향이 꽤 컸던 듯하고, 파 웅음의 영토확장 방향도 그 방향에 두드러졌다. 한편 지금 태국 동부일대인 코랏평원도 정복하였으니, 현재 라오스 영토 서부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펴진 영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 공격만 한 것 같다. 그리고 너무 여자에 하앍했다. 신하들의 딸을 너무 따먹었고 이로인해 왕의 하렘으로 분노한 신하들 때분에 초대왕임에도 불구하고 강제폐위되어 왕좌에서 쫓겨났다. 케타로처럼 무적 체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적당히 해야 하는게 기본적인 원칙이다. 아님 나부터 패걸랑?(......)

 

....이래서 케타로가 욕듣지-_-

 

파 응움은 비록 쫓겨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시대에 동남아에서 한창 퍼지던 소승불교도 도입되었던 듯 한데, 그의 크메르인 왕비가 그 역활에 상당히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라오스의 중요한 불상중 하나인 프라방 불상도 들어왔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불상이 위앙쨘에서 이북으로 이동하길 거부하여 루앙프라방에 안치하지 못하고, 위앙쨘에 안치했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위앙쨘은 우리가 비엔티안으로 알고있는 현재 라오스의 수도다. 동남아 영어에서 V발음은 W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으니 상당수 동남아 발음이 원래 발음에서 왜곡되는듯 하다.

 

 

뭐 이렇게 초대왕으로 나름 간지나던 파 응움이 쫓겨났긴 했어도, 란 쌍은 이후 전성기를 맞는다. 3대왕 쌈쎈타이 때 였는데, 그 뜻은 30만명의 타이라고 한다. 그 때 인구조사에서 타이계인 라오족의 성인남자의 수가 30만명이라고 해서였다고 한다. 여기서 비 타이계 종족의 성인남자는 40만명이였다. 과장이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현재 라오스 인구가 650만밖에 안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 때의 인구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뭐 과장이야 있겠지만 하리마 EYES만큼 과장일 것 같지는.... 모르겠다.

 

...누구세요?

 

나름 잘나가던 란 쌍이었지만 쌈쎈타이 왕의 죽음 이후 혼란기가 이어진다. 짜이야짜까빳 팽패오 왕이 즉위하면서 혼란은 멈췄지만, 문제는 그게 15세기 중반이었고, 15세기 중반에는 동쪽에서 베트남의 레 왕조가 성립하고, 땅따먹기와 유교에 환장한 Great Confucian Otaku 타인 똥 황제가 있었단 점이다. 땅따먹기에 환장한 타인 똥 황제는 베트남과 접경한 란 쌍 왕국의 동부를 쩐 닌부로 편입시켰다. 그래서 분노한 라오족 무앙은 루앙프라방에 SOS를 쳤고 란 쌍은 베트남에 반항한다. 그 결과는? 당연히 관광. 베트남의 18만 대군은 루앙프라방을 점령해버렸다. 그러나 참파와 달리 란 쌍은 자력으로 베트남군을 몰아낼 수 있었고, 비록 쩐 닌을 잃고 베트남에 조공을 바쳐야 했으나 이후 베트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여간 오니즈카.. 아니 영길선생의 말은 잘 들어야 하는 법이다. 백드롭 당하지 않을려면. 

 

 

15세기에 베트남에게 관광을 타긴 했으나 란 쌍은 16세기에 잘 나갔다. 파 응움때 반항해서 위앙쨘에서 움직이지 않던 프라방 불상을 루앙프라방으로 이동시킬수 있었고, 라오스의 건국신화도 만들었다. 한편 제-타이계 왕국들과의 통혼으로 한때 란 쌍의 왕은 자기의 아들을 란 나의 왕으로 앉히는 데도 성공했다. 이 때문에 라오스 역사에서 프라방 불상과 함께 가장 중요한 프라께오 불상도 그 때 란 나에서 가져왔다. 이 프라께오 불상은 현재 태국의 왓 프라께오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때도 옆동네가 문제였으니, 이웃은 아니지만 버마가 통일한 뒤 타이족 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란 쌍의 왕은 란 나의 왕위까지 물려받았었던 세타티라트 왕이었는데 그는 버마의 침공으로 1556년 란 나의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1563년 수도를 위앙쨘으로 옮긴 그는 저항을 계속하여 버마의 침공을 받은 아유타야를 지원했으며 1569년 아유타야마저 버마에 정복당한 후에도 버마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그렇게 힘들게 버마의 침공을 막아내었으나, 그가 죽은 이후인 1574년 란 쌍은 버마에게 정복된다. 그러나 세타티라트의 저항은 헛되지 않아 1591년 란 쌍은 재 독립을 할 수 있었다.

 

란 나, 란 쌍, 아유타야 죄다 버마에게 밟힌 현실이여~

 

이렇게 독립을 하여 17세기 수린야봉사왕의 긴 치세도 넘기지만(재위 1637~1694) 그 이후 란 쌍은 분리된다. 북쪽의 루앙프라방과 남쪽의 위앙쨘이 분리되고, 얼마 안되어서 위앙쨘에서 참파싹까지 분리되어 라오스는 세개의 국가로 분리되고 점차 듣보잡 세력이 되어간다. 북서쪽에는 란 나를 점령한 버마, 서쪽에는 아유타야, 동쪽에는 베트남이 있었으니 외부의 눈치는 눈치대로 보고, 서로 다툼도 계속 하였기 때문이다. 이 균형은 아유타야의 멸망후 시암을 재통일한 탁 신에 의해 깨진다. 역시 이웃이 강해지면 피곤해 지는것은 너무나도 잘 맞는 법칙이다. 도대채 이 법칙이 몇번째인지.

 

 

탁신은 1778년 위앙쨘과 참파삭을 점령해 버렸다. 특히 위앙쨘은 버마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본보기용으로라도 탁신은 위앙쨘을 밟아버리고 어느새 위앙쨘에 돌아왔던 프라방 불상과 프라께오 불상을 약탈해간다. 프라께오 불상은 이후 아직까지도 태국에 있으며, 방콕 왕국의 사원인 왓 프라께오를 장식하고 있다. 라오스는 지금도 돌려달라고 징징거리지만 태국은 계속 쌩깐다. 돌려주면 그 많은 관광객을 어이하게? 세상에 중요한것은 전설이나 간지도 있지만 머니머니해도 머니가 아닌가? 뭐 여하튼 그대신 시암과 친하게 지냈던(???) 루앙프라방은 살아남고 굽신굽신 거리면서 란 쌍의 적자 비등하게 된다. 뭐 위앙쨘이 멸망한 것은 아니지만.

 

 

위앙쨘은 시암의 속국으로 살아남고 굽신굽신 거렸다. 하지만 굽신거리는게 아니꼽고 자신의 능력으로 꼬붕에서 벗어나기 힘들때 좋은 방법이 있으니, 다른 강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위앙쨘에게 있어 그 강자는 베트남이었고, 마침 베트남은 응우옌 왕조를 연 응우옌 푹 아인이 집권했고 응우옌 푹 아인은 망명생활동안 시암에서 거주하며 위앙쨘의 군주와 개인적인 친분까지 다진 상황이었다. 또한 응우옌 푹 아인의 적인 떠이 썬군이 위앙쨘을 공격해서 위앙쨘의 분노를 가져다 줬으니, 그 둘은 당연히 친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응우옌 푹 아인이 베트남의 군주가 되자 위앙쨘은 베트남에 3년에 한번씩 조공했다.

 

 

그걸 믿었는지 베트남과 친하게 지냈던 위앙쨘의 아누 왕(재위 1804~1827)은 도박을 했다. 너무 큰 도박이었다. 바로... 시암에게 개긴것이다. 그는 시암의 영향력에서 벗어날려고 했고 베트남과도 조공만이 아닌 나름 동등한(?) 외교관계를 추구하여 이익을 얻으며 굽신굽신 거렸는데, 시암을 견제하기 위해 란 나, 루앙프라방과의 동맹까지 추진하였다. 실패했지만 말이다. 세상일은 참으로 쉬운게 아니다. 그렇게 세상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포기하는것도 좋지 아니한가? 그는 시암을 공격했다. 그리고 개발렸다. 믿었던 베트남도 지원을 했지만 적극적인 자세도 아니었다. 베트남은 쩐 닌 부를 먹는게 더 중요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아누 왕은 1828년 시암으로 끌려갔고 군만두!!!! 라고 외치는 신세로 전락하다 탈출도 못하고 죽었다. 적절한 포기는 중요한 법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교훈적인 사건중 하나다.

 

 

시암은 위앙쨘을 개판으로 만들고 라오족을 태국 동부 코랏고원 일대로 강제이주 시켰다. 그리고 남은 루앙프라방은 시암에 계속 굽신거리는 신세로 살았다. 물론 베트남에게도 굽신거리고. 그래도 루앙프라방은 나름대로 버티고 베트남이 프랑스에게 발리는 사이 쩐 닌 부를 회복하는데까지 성공한다. 시암과의 관계도 개판은 우호적으로 되어 라오족의 두 불상중 하나인 프라방 불상을 돌려받기까지 한다. 문제는 짱깨국에서 도적떼들이 국경을 건너와서 깽판을 쳤단 것이지만.

 

이런 도적 말고(......)

 

1860년경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고, 운남성에서는 무슬림들의 반란도 일어났다. 중국에서만 깽판치면 문제 없었겠지만, 야들이 라오스로 건너와서 깽판을 친 것이다. 루앙프라방의 국력은 초 안습했고, 상국이라고 하던 시암은 지네들 내정 다지느라 정신이 없었고 짱깨들은 수도까지 위협했다. 그래도 주둔하던 시암군도 1880년대에 짱깨들에게 쳐밟히고, 결국 189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버렸다. 그대신 프랑스는 최소한의 도움을 줬다. 시암을 군함으로까지 협박해서 메콩이동의 지역을 라오스 영토로 삼았으니까. 이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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